4회 이색적인 국내여행 -나홀로 국토대장정 얼어죽을 뻔 하다.
2013년 4월부터 약 40일간 걸었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이동 중이며, 맞춤법 등을 개선합니다.
- 일시: 2013년 5월 2일
- 이동: 영덕군 축산초등학교 >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비치모텔 33.33km
- 누적: 107.79km
- 비용: 31050원
- 합계: 66,830원
죽을 死 일차
잠이 든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대로 잠들었으면 죽었을 것이라는 인체의 본능적 방어 기질이 발동한 게 아닌가 싶다.
새벽 3시 15분
불과 하루전에 묵었던 영덕 삼사해상공원에서의 추위는 오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몇 시간 만 더 잠이 들었다면 저체온증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리라 오버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다. 어둠 속에서 렌턴을 찾아 불을 켜고 온도계를 찾았다.
영상 8도 냉장고의 온도와 별반 다름이 없다.
텐트 내부에는 결로가 얼어 허옇게 서리가 졌다.
덮고 있던 침낭을 상체에 집중적으로 둘렀다. 체온을 빠르게 올리기 위해 슈퍼에서 구매한 초콜릿 바 하나를 먹었다. 추울 때 초콜릿 등을 먹으면 순간적으로 체온이 올라가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 먹는 내내 몸과 이가 떨려 초코바 먹기가 힘들었다.
그리고는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힘이 들면 텐트 안에서 앉았다 누웠다 다리를 흔 들었다가, 두 손으로 언 몸을 비비기도 했다. 새벽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업었다.
촌이라 이미 모든 상가는 문을 닫았고, PC방 같은 곳이 있으리는 만무했다. 스스로 체온을 유지하며 동이 트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텐트밖에 바람은 더욱 심해졌고 메쉬 창으로 된 텐트 사이로 한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닷가 지역이라 일교차가 심한데다 바람이 심했다.
까딱하다간 죽을 수 있겠다 싶어, 머리를 굴려봤다.
다행히도 내 뇌는 극한의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엄청난 속도로 컴퓨터의 CPU 칩처럼 연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집 대문이나 두드려 볼 까?' '아니야 그건 너무 미친 짓이야'
'편의점이 있을까?' '이런 동네는 분명 24시간 운영하지 않을 거야'
등 공상 과학에서 다큐멘터리에 이르는 오만 잡생각을 하다 다행히 괜찮은 결론을 도출했다.
"그래 경찰서로 가자!"
분명 경찰서라면 24시간 운영을 할 것이고, 지금 이 시간에 찾아가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과 휴대폰만 달랑 챙기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기를 머금은 금속 재질의 휴대폰은 얼음을 집어 드는 듯했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경찰서 위치를 파악해 뒀기에 거의 반쯤은 굳어버린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경찰서로 향하는 중에도 한기를 머금은 살인적인 바닷바람은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다. 하필 긴바지를 빨래해서 텐트에 널어놓는 바람에 반바지 차림이다.
"더럽게 춥다! 뒤지겠다! 살려주라~!"
경찰서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행히 불은 켜져 있었고, 살고자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자 손을 뻗는 그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응?!
문이 열리지가 않는 것이다!, 이런 젠장!
문을 두드려보고 인기척을 내봤지만 도통 인기척이 없다. 정신을 추스르고 유리 벽 한편에 위치한 포스터를 읽었다.
용무가 있으신 분은
010-XXXX-XXXX으로
연락주세요
예측이 빗나갔다. 아니 상식적으로 어떻게 경찰서가 문을 닫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촌동네는 6시 이후면 퇴근하는 것인가? 짜증 나는 마음에 전화를 걸려했지만 머뭇 거려진다.
맞은편에 보건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가 환한 것이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작전을 변경하고 보건소를 향해 걸었다. 시간은 오전 4시 15분이다. 당연하게도 보건소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이 동네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빤스를 빨다가 목욕탕 주인아저씨한테 혼나고, 텐트를 치다가 방귀를 마시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텐트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운동화로 갈아 신고는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정도를 뛰자 체온이 돌아왔다. 그렇게 달밤에 죽기 살기로 어두 컴컴한 운동장을 뛰면서 욕을 구령 삼아 신세한탄을 했다.
뛰다가 힘이 들어서 축구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차고 뛰면서 체온을 유지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어느 미친놈이 새벽 4시에 인적이 드문 시골 학교에서 축구공을 차고 뛰어다니리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시간을 버티자.
날이 밝아졌다.
내가 이겼다! 살아남았다!
동이 트자, 짐 정리를 시작했다. 텐트 플라이가 젖어 축축했다. 물기를 대충 털어 논 다음, 아침밥을 준비했다. 따뜻한 뭔가가 들어와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먹고 남겨 둔 카레에 남은 양파 한 개를 썰어 재탕을 했다. 뜨뜻한 카레 국물이 몸에 들어오니 살 것 같다.
이 날 먹은 카레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맛있고 의미가 있다. 다만 그 후로 카레는 잘 안 먹는다. 든든히 아침밥을 챙겨 먹고 오렌지 몇 개를 입에 쑤셔 넣었다.
다시 출발이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일단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걸으면서도 오늘 저녁은 어떻게 버틸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운으로 추위 속에 이 틀은 살았지만 삼일은 자신 없다.
고백컨데 당시에 난 백패킹이 무엇인지 몰랐고, R-VALUE 같은 것들도 알 턱이 없었다. 침낭은 다 똑같은 줄 알았고, 바닥은 등이 배겨서 요가 매트를 들고 간 것뿐이다.
추위에 대한 대비를 너무 안일하게 했다. 매쉬 창으로 되어 있는 텐트와, 얇은 여름용 오리털 침낭 (무게가 500G이다) 내복이라도 준비해 올 것을 후회가 됐다. 쓸데없는 비비큐 양념과 허브솔트, 축구공 따위는 필수품이라 생각하고 챙겼지만, 정작 필요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진중하지 못했다.
포기하고 싶은 맘이 꿈틀 된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라고 목숨까지 버릴 상황이란 말인가?! 7년 동안 기다린 일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야만 할까? 뭔가를 바라며 시도해 본 일이라고는 태어나서 처음인데 말이다.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 집에 가자! 국토대장정이고 나발이고 뒤지면 개죽음이다.'
약해진 마음을 틈타 비루하고, 부정한 생각이 나약함을 짓누른다. 부정이 싹을 틔우자 순식간에 부정의 열매와 꽃이 자라나기 시작해 마음을 지배하려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그래 죽자! 하다가 죽자 ' (그때부터였던가 내 삶이 지금까지 꼬이게 된 것은...)
이제부턴 전투태세다.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낭만 따위를 읊는 그런 여유 따위는 버리자! 지금부터는 생존이고 일단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
여기서 쉽게 포기하고 돌아선다면, 두 번 다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할 것만 같다. 마음을 다잡고 목표를 정정했다.
처음 계획은 당연히 해안 길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렇게 수정한다.
'목표는 고성 통일 전망대! 나머진 그 뒤에 도착해서 포기할지 더 할지를 생각한다!'
목표를 수정하고 나니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이 어렴풋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앞으로 열흘 거리만 더 가면 통일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일단은 열흘만 버티자! 이를 악물고 , 걷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애써 밝은 척 구불구불한 해안길을 향해 걸었다.
Mrs
반복되는 지루한 길을 걷자, 인적이 없고 심심하다. 무료함을 달래려 전자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걸으니 집중이 잘 된다.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어깨의 통증도 조금은 잊을 수 있는데...
빵----!
뭔 시골길에 차가 이렇게 많은지 더 이상 책을 읽다가는 저 세상 책 명부에 내 이름 석자가 새겨질 판이다. 걸으면서 드는 생각은 다양하다. 생각을 하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단편적인 것들부터 아주 세세한 어릴 적 이야기들까지 떠올랐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친구와 다툰 일, 예전에 실수했던 일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했고, 괜스레 울컥해지기도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처음으로 아이팟을 꺼내 들어 귀에 꽂았고, 들러 나온 음악 소리에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감정의 끈을 놔 버리자, 눈가에는 눈물이 펑펑 흘렀고, 터져 나온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않는다. 입에서는 오열이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운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남자라서, 쪽팔리니까, 우는 것은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할필 들은 노래가 배치기의 Mrs라는 곡이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노래 가사였다.
노래를 듣다가 지금까지 엄마에게 모질게 했던 내 모습과 여태까지 아비 없이 홀로 두 자식을 키우는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혹시 누가 볼까 멀티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항상 어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주변 환경 탓을 했다.
간지게 없어서,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불우한 환경에,
친구 누구는 아버지 도움으로 대기업 좋은데 취직을 했는데,
스스로의 상황을 핑계 삼아 책임을 회피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게 너무 죄스럽다. 우리네 엄마도 아주 힘이 들었을 때 나처럼, 자식과 남편 탓을 하지 않았을까? 내 일에 신경을 쓸 때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정말 내 생각만 하고 살았다.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 텐데, 누구보다 엄마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을 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매일 일하러 가던 모습과 피곤에 곯아떨어져 주무시는 모습, 용돈 줄 때의 모습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 걷고, 학교에 들어가고 커가는 모습들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며 나조차도 모르고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나 걷고 학교에 들어가고 커가는 모습들을 아주 작은 것들부터 시작해서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여러 가지 많은 나에 대한 일 들을 알고 있을 텐데 엄마가 잔소리를 시작할 때면"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신경 쓰지 마라라고"못된 소리만 해댔었다. 그게 너무나 한이 되고 슬펐다.
난 엄마의 옛날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관심했다. 이것은 너무 불공평했다. 나는 엄마에게 준 것 없이 항상 빼앗는 편이다. 오늘도, 내일도...
당장 엄마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지급 접고 돌아가는 것은 싫었다. 어깨에 있는 무거운 배낭이 엄마가 지고 있던 짐이라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눠 든다는 생각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니 후련하고, 사명감이 느껴졌다.
몇 년 만에 울어본 기억에 가슴의 큰 응어리가 사르륵 녹아드는 눈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내 마음을 아는지 하늘에서 빗 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어 내렸다. 아프고, 미안한 마음들도 빗속에 씻겨져 나갔으면 했다.'
한참을 비를 맞고 걸으니, 체온이 떨어졌다. 마침 길가에 편의점이 눈에 띄어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가난한 여행자 신분인지라 컵라면 하나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집에서 가지고 온 커피를 먹으려니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만 뭐 어떤가?!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아무래도 좀처럼 그칠 생각이 없다. 울진까지는 비를 맞고 행군을 해야 할 것 같다. 비를 맞고 걸으니,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온다.
다행인 것은 비에 눈 물리 씻겨져 누가 봐도 괜찮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난이도가 상승하는 기분이다. 젖은 운동화로 걸으니 발걸음이 영 시원찮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종아리에선 쥐가 올라온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근처에서 가까운 절을 찾았다. 하루 신세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춥고, 다리도 아프고, 오늘 밤을 넘기는 것이 이상태에선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입구에 들어서서 인기척을 냈다.
"스님 계십니까?~!"
"스님??!!"
처음 부끄럽던 마음과 다르게 인기척에 대답이 없자, 목소리가 커진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이렇게까지 불러댔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개 짖는 소리만 허공을 가를 뿐이다. 조심스레 법당 쪽으로 향하다가 본 화이트보드에 무언가가 쓰여있다.
'서울에서 손님이 와서 출타 중입니다.
저녁 늦게 돌아오니
용무가 있으면 전화 주세요.
이런 씨 x 부처님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모양이다. 뭔가가 자꾸 이 길을 방해하는 기분이라 짜증이 나고 부아가 치밀었다. 욕지거리를 하늘에 퍼붓고는 혹시나 들을 누군가에게 악다구니를 써댔다.
'그래 니들이 아무리 그래 봐라! 내가 포기하나'
야속하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힘겹게 발걸음을 돌려 읍내로 향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가락이 아프고, 온몸이 쓰라린다. 지나오면 서 본 평해읍에 숙소를 잡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조금의 돈이라도 절약해 볼 못땐 심보였는데, 딱 들어 막혔다.
다시 머리를 굴려 근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역시나 무언가가 있다. 마을 회관은 하필 그 비 오는 날 배수관 공사로 운영을 하지 않는단다.
어르신에게 숙소를 찾고 싶다고 하니 여기서 1KM 정도만 가면 숙소가 있다고 했다. 그래 1KM야 뭐!,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즙이 되다 못해 가루가 되고 있는 중이다.
추위와 비, 감정적인 타격이 너무 커서,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힘들게 도착한 여관은 방이 없단다. 아니 촌구석에 대체 누가 이렇게 자냐!.... 이런 개 XX이성을 거의 잃을 뻔했지만 오면서 봤던 민박집이 두 군데라 마음을 추스르고 두 곳을 방문했다.
그렇게 부서지는 몸을 이끌고 두 곳을 방문한 결과 모두 빈방이 없었다.
참담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고, 하필 이곳에 도착한 날짜가 전국 여왕기 배 여자축구 대회로 인해 주변에 있는 모든 숙소가 여자 축구단이 묵고 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다른데 가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언도 있지 않으셨다. 이 말이 서슬 퍼런 날처럼 내 몸을 난도질하는 기분이다.
1시간 거리에 숙소가 한 군데 있으니 그곳에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골반도 아프고 계속되는 추위에 에너지 소모가 심해져 배도 고프고 여러모로 상황은 최악이다. 만약 4KM를 더 갔는데도 방이 없으면 어떡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뿐이 없었기에 전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부둥켜 자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숙소로 향하는 그 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쯤 잃은 정신으로 거의 반쯤 실신한 채 본능에 의지해 앞을 향해 나갔다. 도착한 모텔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방이 있는지 물었다.
만약 방이 없다면 텐트를 치고 이불이라도 돈을 주고 빌려 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방이 정말 딱 1개 남았고, 금액은 35,000원이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장님께 사정사정해서 오천 원을 깎는 비즈니스 맨의 수완을 발휘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배낭을 벗어던지고는 샤워를 했다. 따뜻한 샤워 물줄기가 몸에 닿으니 쓰라리고, 욱신거리다. 욕조에 물을 받아 삼십 분 정도를 몸을 데우니 살 것 같다. 이 단순한 행위가 길 위에서는 큰 행복임을 깨달았다.
샤워를 마친 후 젖은 물건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 스토브를 켜고 밥도 안쳤다.
흰쌀밥과 스팸, 고추장을 이용해 한 끼를 때웠다. 몸에 에너지가 들어가니 몸이 나른해졌다. 그대로 밥을 먹다가 바닥에 곯아떨어졌다가 저녁 12시가 돼서 눈을 떴다. 귀찮아서 더 잘까 고민을 하다, 마음을 고쳐먹곤 일기를 적었다. 일기를 적은 후 다시 한번 잠을 청했다.
따뜻한 이불과 포근한 잠자리가 이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이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이 날은 정말 지옥 같은 하루였다. 4일 차부터는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까딱하면 골라갈 것 같아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내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걸을 때마다.
"오늘만 버티자! 버티고 나면 강해진다! 사람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견디다 보면 강해진다!"라는 혼자만의 응원의 문구를 스스로 되뇌기도 했다. 처음 집을 나왔을 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텐트에서 잠을 잔다고 마음을 먹었다. 경비 절약을 위해서였다.
그런 예측과는 다르게 하루하루가 변화무쌍해서 많은 부분들을 수정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은 도보여행을 하면서 각자의 목표와 테마를 가지고 여행을 할 테지만 절대 예측은 금물이다. 오로지 대응할 뿐이다. (이때부터였던가... 내가 주식을 하게 될 싹이 있음을.. 주식 시장에서의 명언 중 하나 시장은 예측할 수 없고 오로지 대응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길 위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