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잠자리 덕분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고 움직여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잠이 들기가 무섭게 눈이 떠졌다. 어두컴컴했던 하늘은 맑게 걷히고 아침 햇살은 텐트 위를 비추고 있었다. 찌뿌둥하고 뻐근한 몸과 금세 알이 베긴 몸을 부여잡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평소 운동을 안 하기는 했나 보다 세 시간 정도를 걷고 이렇게 온몸에 알이 배긴 것을 보니 앞으로의 PCT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텐트 밖으로 나와 해가 중천에 떴지만 여전히 주무시고 있는 감독님과 피디님을 깨웠다.
'이거 뭔가 바뀐 듯한...' 기분이 잠깐 들지만 몇개월간 같이 이동하려면 길게 생각해야 한다. 텐트를 설치한 곳이 텐트 사이트가 아닌 트레킹 코스 옆 사이로 난 공간에 대충 쳐서 경사가 져있고 땅이 평평하지 못했기에 피곤함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이때만 하더라도 텐트 사이트나 물 포인트 이런 것들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휴대폰 어플이 영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까막눈이라 읽을 수가 없었고, 과도한 부담에 회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침 식사로 오트밀을 먹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오트밀인데 정말 맛이 지랄 같다. 이건 무슨 똥을 뭉쳐놓은 것만 같은 모양새에 일본의 낫토처럼 걸쭉한 질감이 영 아니다. 버릴 때도 없고, 하루를 위해 씹지도 않은 체 목 구녕에 들이부었다.
맛도 맛이지만 일단은 살아야 하니 살기 위해 먹는다. 남은 물을 체크해보니 3리터 정도가 남았다. 어플에 표시된 물 포인트까지는 약 18km 정도로 늦어도 오늘 저녁이면 도착할 것 같아 보인다. 촬영팀 장비가 무거워 멀리 이동을 할 수가 없고, 중간에 촬영도 해야 해서 적응을 고려해 18km 떨어진 물 포인트에서 텐트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PCT에서의 맞이하는 첫 아침을 조금 더 근사하게 즐기고 싶어서 가지고 온 티타늄 컵에 스타벅스 봉지커피를 타 마셨다. 물이 많이 남아서 피디님과 감독님 커피물도 같이 끓였다. 사실은 물 무게를 줄여 배낭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배낭을 패킹하다 보면 아무리 줄여도 줄여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욕심이다. 내 배낭에는 태블릿과 영어책 2권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가득하다. 이상하리만큼 2013년도에 걸었던 국토대장정을 할 때의 교훈을 벌써 까먹은 듯하다. 당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무게이고, 촬영을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배낭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짓눌렀지만 나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배낭에 카메라와 배터리 삼각대를 챙기고 다니는 피디님과 감독님을 볼 때마다 함부로 힘들다는 말을 감히 뱉을 수가 없다.
'이래서 혼자 걸어야 하는 건데...'
다시 배낭을 싸고 걷는다. 한 가지 측면에서 괜찮은 점은 부사관 생활을 하면서 전투준비태세를 하며 군장을 남들보다 수도 없이 패킹을 해봤다는 점이다.
들어가는 물건이 많을지언정 5분 에서 10분이면 배낭 정리가 끝났다. 먼저 배낭을 정리해 놓고, 바위에 걸터 쉬면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두 개비를 피우고서야 다른 분들은 떠날 채비가 완료됐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함께 하기로 한 이상 서로 간의 양보가 필요했다. 좋아서 걷는 사람과 일로 오는 사람은 그 무게감이 다르니 말이다.
만약 이런 오지에 일을 위해 미국 출장을 보낸다면 내 입장에서 가지 않을 것 같다.
막 출발하려던 무렵 하이커로 보이는 두 명이 인사를 건넸다.
"하이! 하우 이즈 곤?!"
그들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8비트 연산을 하기 시작했다. '하이는 그러니깐 안녕이고 하우 이즈 곤 하우는 어떻게 곤? 곤은 뭐지?? 뭐라는 거야?' 일단 답변은 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 미국 땅에서 미국인인지 캐나다인인지 아무튼 노란 머리의 백인 형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 순간이다.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선생님이 언젠가 그랬다.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는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나간 한국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누워있는데, 경찰관이 와서 물었단다 "How are you? " 그러자 그 여자는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를 외쳐서 경찰이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고많은 대답 중에 아임 파인땡큐가 웬 말이냐, 심플하게 굿-!이라고 대답을 했다면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 And you?라는 질문까지 붙였으니 친절한 백인 형은 아예 배낭을 내려놓더니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AWW! Where are you from? are you Japanese? "
3년 전 영어회화학원을 5개월 정도 다녔던 것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코리안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아... 아임 프프 럼 코리아.. 낫 노스 "
그러자 백형은 뭐가 그리 웃기는지 폭소를 터뜨렸다.
"Yea of course!! Nor... @#$%$^^&%$$" 너무 길어서 영어로 적는 것을 생략하지만, 백형의 말인즉슨 노스 코리 이아에서 왔다면 간첩이니 너는 분명 사우스 코리안 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혼자 웃는 것이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혼자서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이 형 숨은 쉬는 건가? 그렇게 십여분 정도가 지난 후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놀란 가슴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맙소사 오늘 외쿡인 이랑 10분 이상 대화를 했다. 그저 예스와 노 아이 돈노 세 단어로 10분 이상의 대화가 가능했다. 영어 학원에서 가르쳐 준 아이 헤브 투 와 슈드 아이 썸띵 등등을 써먹지 않아도 10분 이상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 영어 좀 잘하는 듯?
날씨가 굉장히 덥다. 와 씁.. 이건 듣도 보도 못한 더위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늘 한점 가려줄 나무 하나 찾기가 불가능하다. 정오가 다가오자 태양은 더- 뜨거워졌고, 배낭에 연결된 물 호수를 시간이 날 때마다 쭉쭉 빨아댔다. 촬영팀은 무게를 고려해 각자 물을 1리터씩만 챙겼었다.
중간에 차가 들어오는 길이 있다고 해서 첫 계획은 첫날에 물은 많이 들고 가지 말고 중간에 보급으로 받아 물을 보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과 별개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3리터를 챙겼는데 잘한 결정이었다.
출발 전 니콜라(크로아티아 출연자)가 6리터를 챙겨가라고 조언을 해줬다. PCT 가이드라는 책에 급수 포인트가 자주 마르니 조심하라 했다. 그 말을 듣자 뭔 헛소리 냐면서 사람이 6리터를 어떻게 챙기고 다니냐고 , 그런 건 백인들이 엄살이 심해서 과장한 거라 한국인은 반만 챙겨가면 된다고 말했다.(물론 통역을 통해서)
니콜라는 너네들이 죽더라도 절대로 물을 나눠 주지 않을 거라 했다. 사실 이 말을 듣고 1리터를 챙기려던 것을 3 리터 챙겼는데, 6리터를 챙겨 올 것을 후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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