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반쯤 초주검이 된 채 잔디 위에 누웠다. K 측에서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것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지는 PD 님과 카메라 감독님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생겼다. 산에 들어가면 3~4일 이상은 걸어야 하는데,
답사는 몇번 왔지만 실제로 걷는 것은 첨인지라 이것저것 챙겨 온 불필요한 장비와 큰 카메라 현지 포터 또한 없어서 출연자도 촬영팀의 짐을 짊어지게 되는 막무가내 운행에 감독님은 짜증이 났던 것이다. 시작한 지 며칠 지났다고 보급팀과의 문제로 물이 부족해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촬영을 강행했던 것이라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PD님이 연배가 있어 최대한 자제하면서 의견을 피력하는 중이라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감정의 골이 상했나 보다, 옆에서 멀뚱멀뚱 지켜보다가 갑자기 PD님이 '그럼 두 분은 여기서 있으세요'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졸지에 공모자가 된 기분이다. 난 그저 누워 있었을 뿐인데, 당시엔 담배를 피우러 가셨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늦은 점심을 감독님과 먹으며 텐트 칠 공간을 찾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말했다.
"선배님 가방이랑 짐 놔두고 가버린 것 같은데? "
"?!!!"
게 뭔 시추 레이션 인지 내가 두 명을 놔두고 가버려도 모자랄 판에 나와 감독님을 남겨두고 기분이 상하셨는지 먼저 가버린 것이다. 물도, 장비들도 그대로 두고 말이다.
"....."
감독님과 몇 분간 말없이 줄 담배를 피웠다.
침묵이 지나고 감독님이 입을 열었다.
"재익 씨 미안해요..." 원래 출연자가 이렇게 개고생 하는 경우가 없는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여기서 올지, 안올지 가버린 PD님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무리해서 마을을 갈 것인가?
마을까지는 약 15Km 정도가 남아 있었다. 웬지 모르게 쓸쓸하고 울적하다. 혼자가 된 기분이지만 성격 좋은 감독님이 계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왔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리하게 운행을 했을까? 아니면 적절하게 구간을 배분해 무리 없이 이 구간을 마무리했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PCT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럽게 힘든 곳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멀리 보지 않으려 했지만 벌써부터 6개월, 이틀이 지났으니 남은 178일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상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시에라 구간은 더 빡세 다는데, 지금보다 더 힘들다는 것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현재도 몸 상태의 백 퍼센트 이상으로 겨우 걷고 있다만, 나중에라도 달라질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물이 없는 상태로 이곳에서 하루 숙박하고 갈 것인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레이크 모레나로 이동을 할 것인.... 상의 해본 후 하루를 더 머무른다 해도 물이 없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더 힘이 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감독님과 난 몸 상태가 최악이지만 레이크 모레나에 도착하면 하루 휴식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고 오늘은 운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걱정인 점은지금부터 가야 할 곳은 한국에서도 잘 경험해보지 못한 경사의 미친 코스였다, 개인 배낭 무게 18kg에 카메라 렌즈, PD님이 두고 간 카메라 다리를 포함해 짐을 나눠 짊어지니 못해도 30kg 이상은 나갈 듯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감독님이 선두로 출발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허벅지까지 느껴지는 긴장, 중압감이 전과는 다르다. 회의감이 몰려온다. 왜? 난 카메라와 카메라 다리를 들고 걷고 있는가?
조금 전만 하더라도 반 탈수 증상이 와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피디님이 말도 없이 가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한발 한 발을 걸을 때마다 오금과 허벅지 뒤쪽에서 쥐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로의 배낭이 무거워 스무걸음을 걷고 10여분을 쉬면서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중간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돌에 걸터앉다가 배낭 무게에 중심이 쏠려 뒤로 꼬꾸라질뻔했지만 감독님이 빠르게 잡아줘서 개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서러움과 짜증이 폭발 일보 직전이지만 걷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조금 지나면 날이 질 것 같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오르막을 다 올라가야만 안전했기에 힘들어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감독님은 등산 스틱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등산 스틱을 하나 나눠줬다. 지게를 멘 그 먼 옛날의 누군가들처럼 등산 스틱을 지팡이 삼아 조금씩 전진한다. 세 걸음을 못 가 허벅지에 쥐가 올라온다. 쥐가 올라와 배낭을 벗고, 메기를 여러 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배낭을 풀어 뭔가를 주섬주섬 먹었다. 당과 수분 칼로리가 부족했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대다가 하나둘 배낭에 있는 식량들을 돌 위에 올려뒀다.
웃기게도 이 언덕에 길가 주변에 하이커들이 두고간 식량과 불 필요한 도구들이 많다.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즉 무단 투기는 아니었다. 옷가지부터 시작해서 식량 심지어는 신발도 있다. 나중에서 안 사실이지만 여기서 레이크 모레나는 빠른 걸음으로 2시간이면 되는 거리였다. 이렇게 놔둬도 주말과 평일에 많은 데이 하이커들이 오며 가며 주워간다고 한다.
그때였다.
멀리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우리쪽으로 왔다.
PD님을 만났다.
PD님은 많이 놀라 듯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우린 PD님을 찾으러 간다고 대답했다. 감독님과 PD님의 미묘한 신경전 덕분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PD님은 마을에 물을 얻으러 가셨다고 했고, 배낭에는 물을 가득 채워 오셨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출연자(니콜라)를 촬영하는 두 번째 팀도 오다가 길을 잘 못 들어서 행방불명이 됐다고 한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PD 님도 미안한 눈치였고, 어느 정도 분위기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감독님과 나는 계속 가기로 했다. 피디님이 주고 간 콜라를 마시니 몸이 살 것 같다. 둘이서 사이좋게 콜라 한 모금을 나눠 먹으면서 담배를 피우며 기력을 보충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야간행군을 해야만 했다. 레이크 모레나로 향하는 중에 스틱이 배낭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박살이 났다. 체력은 고갈 상태라 한발 걸을 때마다 쥐가 올라왔음에도 여러 번 그래도 가야만 했다. 감독님과 난 PCT 2일 만에 야간행군을 해야 하는 상황을 어이없어했지만 서로를 의지 삼아 20분을 걷고 20분을 휴식하면서 겨우겨우 걸었다.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의 향연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뭔가 울컥한데 감동을 받아 울컥한지 아니면 왜 야간행군을 하고 있는지 의아함에 울컥한 것 인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보고 싶다...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로 밤 10시가 넘어서 레이크 모레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독님은 프로의식이 대단하셨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마지막 촬영을 한번 하자고 먼저 뛰어가서 세팅을 마쳤다. 촬영을 마무리 짓고 서둘러 지원팀을 찾아봤지만 지원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저렴한 통신사의 감독님과 나의 폰은 이곳에서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처음 목표했던 대로 오늘 힘들게 걷고 방에서 푹 쉬며 고칼로리 음식을 먹으면서 내일 하루 쉬는 것을 목표로 걸어온 터라 포기할 수가 없다.
담배를 꾸역꾸역 피워대며 방법을 궁리했다.
그때 화장실 앞에서 하이커 한 명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게 눈에 보여 얼른 다가갔다.
"익스 큐즈미!! 아이 니드 헬프!! 아이 원츄 원 콜! 플리즈!"
다행히 하이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물론!" 하고는 휴대폰을 빌려줬다. 감독님이 지원팀에 전화를 걸어 2번의 실패 끝에 3번째에 겨우 전화를 받아 우리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감독님과 나는 부둥켜안으며 살았다를 연발했고, 찐한 전우애가 느껴졌다.
레이크 모레나에서 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은 지원팀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많이 떨어져 패딩과 레인재킷을 입었음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린 후에 지원팀과 만났다. 우리가 휴대폰이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저 화장실에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레이크 모레나에 화장실이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안도의 한숨과 우리를 픽업 온 현지 코디님이 건네준 맥주 한 캔을 원샷 때리고서야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우리는 차에 몸을 실고 50km 떨어진 숙소로 향했다. 숙소 앞에 데니스라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코디님 말로는 미국의 김밥나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정크푸드 고칼로리 음식, 양이 많은 곳이라 소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딱 예상했던 사람들만 올 것 같은 인상이 풍긴다. 전형적인 미국인들 체형(뚠뚠)의 사람들이 열심히 앉아서 음식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감독님과 둘이서 음식을 세 개를 주문했다. 한국땅을 떠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지 미국 음식이 너무 맛있다. 먹다 보면 왜 미국 사람들이 살이 찔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을 저절로 알게 될 만큼 양이나 칼로리가 어마어마하다.
한잔에 1200칼로리가 들어있는 오레오 쉐이크를 두 잔이나 먹으면서 단시간에 5천 칼로리 이상을 집어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욕조에 물을 받고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긴장이 풀려서 잊고 있던 고통이 몰려왔다. 으윽~ 소리를 연신 내지르며 삼십여 분간의 찜질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잠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이 들 줄 알았는데,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있을까?라는 불안함과 걱정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매일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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