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멕시코 국경 경계선인 CAMPO에 도착하자, 촬영이 시작됐다. 이미 몇 번 해본 터라 곧 잘하는데, 뭔가를 느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처음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은 남들과 같이 동행해서는 자기자신에게 집중하기 힘들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여행을 할 것 같다. 다행인 점은 3주 정도만 지나면 K팀과 헤어져 혼자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이 놓인다.
장거리 걷기 여행인만큼 페이스 조절이 중요한데, 동행하면서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캠포에 도착할 당시 혼자가 아니었는데, 먼저 도착한 댄과 브라운이라는 친구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보였고, 벌써 꽤나 시간을 허비한 듯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상기된 얼굴은 긴장이라던지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사실은 두려웠다. 살면서 처음으로 가까이서 외국인을 본다. 그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영어를 할 줄 모르고 듣지도 못했던 비루한 나인지라 그저 아임 잭, 아임 잭 이라고만 대답을 해야만 했다.
영어를 못했음에도 딱 하나 귓속에 박히는 문장이 있었는데,
"두유 헤브 어 시가렛?" Do you have a cigarette??
뚱뚱한 댄이 물었다.
난 '예스'라고 대답을 했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1달러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손사래를 치며 노노 아임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뚱보 댄은 나를 끌어안더니,
"오!! 브라더!!!!! 유아 소 퍼펙트 맨!!! 땡큐 땡큐 베리 뭐 어어어 취!"라고 하는 거였다.
꽤나 유쾌한 녀석들이다. 문득 댄의 큰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육중한 크기의 가방이 모래 바닥 위에 놓여 있다. 둘은 마치 덤 앤 더머처럼 뭔가 웃기면서도 콤비가 잘 맞아 보였다. 댄은 덩치가 있는 반면 브라운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둘을 보고 있자면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배낭의 무게를 물어봤다. (물론 이때는 내가 영어를 못해서 감독님이 물어봤다.)
25kg 정도 된다고 했다. 와 미친... 그리고 특이한 점은 리저브(빨대를 이용해 물을 마시는 물통)가 2개라 물을 왜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하나는 맥주라고 얘기했다. 역시 천조국인가? 아메리칸 스타일은 처음부터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들고 있던 맥도널드 햄버거를 물어뜯으며 맥주를 연신 마셔 대었다. 마음 같아선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지만 둘 상태가 반쯤 맛이 가보였다.
삼십 분 정도 지난 후 댄과 브라운은 먼저 출발을 했고, 나는 촬영 때문에 같은 동작을 몇 번을 되풀이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뭔가 준비를 하거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로 시작이 되어버렸다. 비유하자면 다이빙을 하려고 멋지게 폼을 잡고 언제 뛰어들까 말까 고민을 하는 중에 누군가가 떠밀어 얼떨결에 물에 다이빙을 하는 찝찝한 기분이랄까?
이유가 어찌 됐든 한 걸음을 내디뎠다. 햇살은 따뜻하고 걷는 동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내 얼굴과 몸을 스쳐갔다. 상쾌하고 왠지 모르게 울적하던 기분이 이내 곧 청량감으로 바뀌었다.
6개월 하루 30KM 기준으로 매일 걸어야 하는 이 길...
잘할 수 있을까? 왠지 모르게 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촬영이라는 부담감이 있어 그러지 않나 지금에서야 생각해본다. 걷는 동안 카메라가 따라다니니 표정 하나 쉽게 낼 수 없게 된다.
조금 걸어 나가자 PCT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큰 길만 따라 걷다가 드디어 좁은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갔을까? 얼마나 많은 감정들..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머금은 체 그들은 지나갔을까? 수 만 명이 걸었을 이 길에 들어서니 새로운 감회가 들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영화에서도 보았고, 사진으로도 보았고, 글로도 봤다. 매번 상상하던 곳을 내가 걷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제 그 수많은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 하나를 온전히 새기기로 한다.
1마일 이정표와 첫 급수 포인트에 도착했다. 미국은 KM 단위를 사용하지 않고 MILE이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 이것 때문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1마일은 약 1.6Km이며, KM표기처럼 딱 들어맞지 않는다.
갈증은 나지 않지만 왠지 첫 급수 포인트라 두 손 가득 물을 담아 세수도 해보고 물을 마셔보기도 했다. 스프링 쿨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이라 정수필터는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마셨다.
얼굴에 살이 그득하다. 우스갯소리로 누군가가 김정은 닮았다고 했다. 실제로 글을 옮겨 적는 지금(현 체중 72KG 당시 89) 내 모습이지만 정말 돼지 같다.
평소 원체 걷지 않아서인지 2시간 정도를 걸었음에도 온몸에 근육통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까지는 길이 평탄하고 걸을 만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습도가 그리 높지 않아 우리나라의 여름처럼 조금만 걸어도 땀이 범벅이 되는 일은 없었다. 걷는 중 바람이 조금 불어오기라도 한다면 청량감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걷기 시작한 지 조금 지나자 댄과 브라운을 만날 수 있었다. 둘은 여전히 걸으면서 리저브를 통해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마 며칠 못 걷고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왜 이곳에 왔냐는 질문에 의미 없다고 유쾌하게 대답하는 댄과 브라운 무언가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걸으면서 하루하루 버틴다면 작은 의미가 모여 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단다.
'짜식.. 생각보다 멋진데? '
그래 의미라.. 의미가 중요한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면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기로 댄과 브라운처럼 곧 포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장비의 퀄리티에 연연하지 않고 집에 있는 물건들을 덕지덕지 모아 배낭에 한 가득 쑤셔놓고 길은 나서는 것 그것조차 의미가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댄과 브라운은 내가 PCT를 걸은 후 처음 사귄 친구들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첫날 8KM 정도를 걸었다. 오후 늦어서야 출발을 했고, 적응도 안됐던지라 온몸이 피곤하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텐트를 대충 치고는 잠자리에 누웠다. 이날 달이 너무 밝고 별들이 너무 많아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별들의 향연을 보고 있자니 오르가슴을 느낄 정도다.
극에 다다를 때쯤 한 번씩 별똥별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잠을 쉽게 잠이 들 수 있을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저녁은 대충 초코바 1개를 집어 먹었고, 텐트에서 태블릿을 이용해 일기를 작성했는데, 이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세도 엉거주춤이고 텐트는 좁고, 일기를 쓰다 보니 2~3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낯섦을 경험하러 온 것이 어떤 무언가를 위해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PCT에 관해 포스팅을 앞으로 하겠지만 포스팅을 위한 여행인지 낯섦을 조우하는 여행인지, 과연 포스팅을 위해 내 현재의 시간을 바친 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물론 더 좋은 글 더 생생한 기억으로 남겠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기록과 느낌을 남기지 않았다. 훗날 돌아가서 글을 작성한다면 기억이 나지 않은 부분은 특별하지 않은 경험일 테고, 특별한 경험은 노력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남을 테니 말이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여행이 되고 싶었다.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아 담배를 많이 태웠다. 이날 저녁만 해도 다섯 개비는 넘게 피운 것 같다. 담배를 5년 정도 끊었지만 피우는 건 한순간이다. 애써 잠을 청하며 잠들기 전 '시' 하나를 자장가 삼아 읽어본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ylan Thomas, 1914 - 1953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노인이여, 하루가 저무는 것에 발끈하고 노여워 하세요.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현명한 자는 자신의 임종에 어둠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말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때문에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선량한 자들은 마지막 파도곁에서 얼마나 아름운지 울어요
그들의 덧없는 물결이 푸른 강기슭에서 춤출 것처럼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높이 떠 있는 태양을 찬양하며 붙들려하는 거친 사람들은
너무 늦게 깨닫게 되죠. 그들의 방식대로 태양을 떠나간다는 것을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무덤지기들, 죽음과 가까운, 눈먼 눈으로 보는 자들
먼눈에는 유성처럼 찬란하고 화려하게보일지라도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그리고 내아버지, 슬픔 가득한 곳에 서 있는 당신
당신이 격한 눈물로 지금 나를 저주하고 축복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순수히 저 멋진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분노하고, 분노 하세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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